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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황제’, 황제라는 이름을 벗고 인간으로 살아가기까지(제국주의, 권력 상실, 정체성)

by 장동구 2025. 6. 3.

영화 '마지막 황제' 포스터

영화 ‘마지막 황제’는 단순한 역사극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격동의 중국 현대사 속에서 개인과 권력, 그리고 정체성의 해체와 회복이라는 깊은 주제를 탐구합니다.

 

황제로 즉위한 지 다섯 살,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없이 자라나야 했던 인물 ‘푸이’는 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마주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서사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주요 흐름을 따라, ‘제국주의’, ‘권력 상실’, ‘정체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권력을 휘두르지 못한 황제(제국주의)]

영화는 푸이가 다섯 살에 자금성으로 불려 가 황제로 즉위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실질적인 통치력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자금성 안에서 그는 신처럼 대우받았지만, 담장 밖에서는 이미 청나라가 몰락의 길로 접어든 상태였습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제국주의가 실질적 권력보다는 상징의 유지에 집착했던 구조임을 보여줍니다.

 

푸이는 궁전 내부의 전통과 의례 속에서 자라나지만, 한 번도 스스로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는 마치 전시된 유물처럼 취급되며, 누군가의 손에 의해 세워지고, 움직이며, 길러지는 존재였습니다.

 

제국주의의 본질이 인간의 삶을 정치적 구조물로 고정시키는 것이라면, 푸이의 어린 시절은 그 상징이 인간에게 어떤 폭력으로 작용하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결국 영화는 제국주의의 외형보다, 그 체제에 갇힌 한 사람의 감정과 고립을 따라가며 제국이라는 말의 허망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무너지는 지위 속에서 마주한 현실(권력 상실)]

청 왕조의 몰락 이후, 푸이는 자금성에서 쫓겨나며 황제의 지위를 박탈당합니다. 이후 일본의 후원 아래 만주국의 괴뢰 황제로 다시 등극하지만, 실상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는 법령조차 스스로 읽지 못하고, 모든 중요한 결정은 일본 관료에 의해 통보받습니다.

 

영화는 이 시기를 통해, 권력이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허락한 순간만 유효한 허상’ 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푸이는 여전히 황제라는 호칭을 들으며 살아가지만, 결정권도, 존엄성도 부여받지 못한 채 형식적인 존재로 소모됩니다.

그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용되고 버려지며, 역사 속 권력이란 얼마나 일시적인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단순한 몰락의 비극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푸이가 자신이 과거에 누렸던 ‘권력의 본질’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여정으로 그립니다.

 

전범으로 체포된 후 감옥에서 자신이 서명한 법령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은, 권력이 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황제도 결국 한 사람으로 돌아간다(정체성)]

영화 후반, 감옥에 있던 푸이는 정원사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아갑니다.

 

황제였던 그는 이제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며, 처음으로 ‘누군가가 아닌 자신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푸이는 황제였지만, 동시에 희생자이자 이용당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제국의 몰락과 함께 ‘자신이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묻는 여정을 살아갑니다.

 

정체성은 권력의 외피에서 벗어났을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그는 처음으로 외부로부터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자아에 집중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의 정원은 단순한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삶을 구성할 수 있다는 자각의 장입니다.

 

영화는 푸이가 일상의 리듬을 따라가며 조금씩 감정과 인간관계를 회복해 가는 모습을 통해, 정체성의 복원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푸이가 자금성의 과거 황제 의자 밑에 숨겨둔 물건을 소년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그는 더 이상 황제를 숨기지 않고, ‘살아낸 역사’로서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결론: 제국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이 남다]

푸이는 세 번 황제가 되었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모든 권위를 잃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으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제국을 해체시키거나 비판하려는 목적에 머무르지 않고, 황제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선을 옮깁니다.

 

정치와 역사, 그리고 문화라는 격동의 파도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조용하고 묵직하게 전달합니다.

 

감독은 푸이의 일생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영화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황제였던 자도 결국,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