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내가 지인에게서 예쁜 꽃다발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화병에 꽂아두고 향을 맡자 방 안이 갑자기 환해지더군요.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분을 바꾸고 순간의 기억을 소환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은은한 향을 맡는 순간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습니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이 작품은 처음에는 ‘향기’라는 감각적 호기심에서 시작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집착과 결핍, 그리고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오늘의 글은 단순한 영화 소개를 넘어, 왜 향기가 주인공의 파멸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그 사례가 우리 일상에서 던지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깊게 파고들고자 합니다. 꽃 한 송이의 향기에서 출발해 인간 욕망의 끝을 들여다보는 일—그 과정 자체가 이 작품을 다시 보는 이유입니다.
[향기에서 출발한 집착: 감각이 욕망으로 변모하는 과정(본성)]
후각은 인간 감각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입니다. 시각이나 청각처럼 외부 정보를 해석하기 전에, 후각은 본능적으로 감정을 건드립니다. 과학적으로도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관장하는 편도체와 해마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 어느 특정 향은 과거의 장면을 즉각 소환합니다. 이런 신경학적 특성 때문에 향기는 곧바로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는 이 점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인물입니다. 그는 타고난 후각 능력으로 모든 향을 구분하고, 향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향을 ‘느끼는’ 수준을 넘어 향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 전환이야말로 본작의 핵심적인 서사적·철학적 출발점입니다.
사소한 향기 경험들 예를 들면 어머니의 향수, 빵 굽는 냄새, 이웃집 장미 등 이 모든 것들이 한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구성한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친숙합니다. 문제는 ‘소유’의 욕구가 개입될 때 발생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향기를 즐기고 그것을 통해 위로받지만, 대개 그 즐거움은 공존과 공유의 방식으로 끝나곤 합니다. 그러나 그르누이는 달랐습니다. 그는 향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반응’하도록 만들어야겠다는 환상을 품었습니다.
즉, 향기는 인간의 내면을 건드리는 열쇠이자, 동시에 권력과 통제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여기서 짚고 싶은 것은 이 한 줄의 변화입니다. 감각적 경험이 욕망으로 '전환'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균형을 잃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 균형 상실이 어떤 방식으로 파국으로 이어지는가?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묻는 핵심 질문입니다.
영화 정보
제목: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
감독: 톰 티크베어
장르: 드라마, 스릴러
개봉: 2006년
출연: 벤 위쇼, 더스틴 호프만, 앨런 릭먼 외
러닝타임: 147분
[집착의 발화: 향기를 소유하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윤리적 붕괴(욕망)]
영화는 그르누이의 성장 배경을 통해 집착의 토대를 보여줍니다. 그는 고아로 버려지고 학대받으며 자랐고, 인간적인 애정과 인정은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결핍은 감각적 탁월성 즉, 정확한 후각으로 보상되지만, 결국에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됩니다. 집착의 발화는 작고 사소한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특정 여성의 체취가 그에게 '완벽함'의 기준으로 다가오자, 그는 그것을 단순히 기억하는 수준을 넘어서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심리학에서 집착은 결핍의 과잉 보상이라는 측면이 강합니다. 결핍된 정서적 유대는 과도한 대상화로 이어지고, 대상화된 대상은 결국 수단화됩니다. 그르누이는 향기를 수단화했고, 그 결과는 인간적 도덕의 붕괴였습니다.
더구나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점점 더 윤리적 한계를 넘습니다. 향을 채집하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인간성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아주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향기를 향한 욕망이 커질수록 그르누이는 냉혹해지고, 그의 행위는 개인적 집착을 넘어 사회적 범죄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마주합니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윤리적 한계를 넘어선다면, 그 욕망은 더 이상 나를 완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르누이의 집착은 오히려 그를 공허하게 만들었고, 그 공허는 결국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영화는 이런 과정을 통해 집착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소멸시키는 방식을 통렬하게 드러냅니다.
또한, 집착이란 개인 차원을 넘어서 문화적·사회적 맥락에서도 증폭될 수 있음을 영화는 암시합니다.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는 군중을 하나로 모으고, 집단적 광란을 촉발합니다. 이는 단지 개인적 집착이 아닌, 집단의 감정적 취약성까지 자극하는 기술로 전이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집착은 개인을 파괴할 뿐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이성마저 흔들 수 있습니다. 본론1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점입니다. 욕망의 시작은 사소할 수 있으나,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타인과 사회에 파급되는가는 예측하기 어렵고, 파괴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파멸의 문턱: 욕망이 얻어낸 것과 잃은 것의 역설(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영화의 말미에서 그르누이는 ‘완성된 향수’를 만들어내고, 그 향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이 ‘획득’의 순간은 역설적으로 그의 궁극적 상실을 드러냅니다. 그는 향으로 사람들의 애정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애정은 진실된 교감이 아닙니다. 향수에 반응하는 군중은 향에 의해 조작된 감정일 뿐이며, 그 감정은 지속되지 못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소유’를 실현했으나, 주체로서의 자기실현에는 실패했습니다.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결코 내면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종종 외형적 성취(명성, 물질, 인정)를 통해 내면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듯, 외형적 성취가 가져다주는 것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충만감뿐입니다. 진정한 충만감은 타인과의 상호성에서 오며, 타인의 반응이 ‘조작된’ 상태라면 그 충만감은 가짜입니다. 그르누이는 향수를 통해 군중의 사랑을 얻었으나 정작 스스로의 정체성과 관계에서는 더 깊은 고립을 경험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소유 중심적 욕망에 대한 강한 메타포로 읽힙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한 가지 더 무겁게 남깁니다. 그르누이의 파멸은 그가 개인적 결핍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범한 윤리적 초월이 사회적 심판을 초래합니다. 우리가 욕망을 좇는 과정에서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의 선택은 어떤 윤리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론2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욕망이 성취로 전환될 때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그 계산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결론: 욕망과 집착 사이, 균형을 찾는 일]
결론적으로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향기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향기를 매개로 인간 욕망의 본질과 집착의 파괴력을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향기는 촉발점이자 상징일 뿐, 진정한 문제는 집착 그 자체입니다. 오늘 꽃 향기를 맡으며 느낀 소소한 기쁨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감각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식으로 몰아갈 때 우리는 위험한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절제와 성찰을 촉구합니다. 욕망은 삶을 풍요롭게도, 파괴적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구체적인 실천적 지침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감각적 쾌락과 욕망을 분리해 보라. 어떤 경험이 나를 위로하는지, 아니면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인지 스스로 점검하라. 둘째, 소유와 통제의 충동이 일어날 때, 윤리적·사회적 비용을 먼저 생각하라. 타인을 해치면서까지 채워지는 욕망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셋째, 진정한 관계는 조작이나 소유가 아니라 상호성에서 온다는 점을 명심하라. 타인의 반응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사용하는 대신, 함께 나누는 태도를 지향하라.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소유하려 하는가? 그 소유는 진짜 관계를 만드는가, 아니면 허울뿐인 만족인가?” 이 질문에 성실히 답할 때만이 욕망을 건강하게 다루고, 집착에서 벗어나 진짜 삶의 충만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