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영화는 인간의 두려움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사회의 민낯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감독, 조던 필은 공포를 통해 미국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을 꿰뚫습니다.
그는 '겟아웃'에서 인종차별의 위선을 파헤쳤고, '어스'에서는 계급과 정체성의 분열을 들춰냈습니다.
이 글은 두 작품을 통해 조던 필이 어떻게 호러 장르를 통해 미국의 정체성과 균열, 그리고 억압의 본질을 고발하는지를 분석합니다.
[조던 필이 확장한 공포의 대상(계급)]
'겟아웃'은 흑인 남성 ‘크리스’가 백인 여자친구의 가족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불편한 사건들을 다룹니다.
처음에는 환대처럼 보이던 백인 가족의 태도는 곧 불쾌한 위선으로 드러나고, 결국 그들은 크리스를 ‘신체 교체’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우리는 인종차별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도, 그 내면에는 흑인의 신체를 소비하는 폭력적 욕망이 감춰져 있습니다.
조던 필은 여기서 공포의 대상을 '명백한 증오'가 아니라, 리버럴 백인의 '친절한 위선'으로 재설정합니다.
이는 기존 공포 영화에서 악이 외부에 존재했다면, 조던 필의 공포는 ‘나와 가까운 타인’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반면 '어스'는 인종을 넘어선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애들레이드 가족이 휴가 중에 자신들과 똑같이 생긴 복제 인간에게 습격당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복제 인간들은 단순한 괴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미국 정부의 비밀 실험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버려지고 잊힌 존재들입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살아온 이들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계층, 즉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조던 필은 공포의 대상이 인종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계급과 배제의 구조’ 임을 강조합니다.
'겟아웃'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받는 공포"였다면, '어스'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공포"입니다.
같은 얼굴을 한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도플갱어의 공포를 넘어서서 사회가 만들어낸 ‘억눌린 자아’가 돌아온다는 복잡한 은유로 작용합니다.
두 영화 모두 ‘타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포는 ‘우리 안의 타자성’에서 비롯됩니다. 조던 필이 말하는 공포는 단지 피부색이나 사회적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구축하고 누리고 있는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입니다.
[조던 필 특유의 상징적 장치들(상징)]
조던 필은 단순한 이야기보다 구조와 상징을 중시합니다. 그는 추상적인 공포를 구체적인 공간과 장치로 형상화해 관객이 ‘생각하게 만드는 공포’를 만들어냅니다.
'겟아웃'에서의 ‘서커플레이스’는 그 상징의 대표적 예입니다.
크리스가 최면에 빠져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게 되면서 빠져드는 어두운 공간은, 흑인이 사회에서 어떻게 침묵당하고 객체화되는지를 시각화한 장면입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말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인식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상태. 이 극단적인 무력감은 단순한 초현실적 장치가 아니라, 현실 속 흑인의 경험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어스'에서는 이와 유사하게 ‘언더그라운드’라는 공간이 등장합니다. 지하에 숨어 살아온 복제 인간들이 ‘지상의 나’와 똑같은 행동을 강제로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현실에서 구조적으로 억눌린 계층의 삶을 은유합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했고,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지상과 지하, 선택받은 자와 버려진 자의 구분은 곧 미국 사회의 계층 구조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조던 필은 공포의 리듬보다는 사회 구조의 ‘은유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괴물을 등장시켜 관객을 놀라게 하기보다는, 그 괴물의 배경을 설명하며 "왜 우리는 이들을 두려워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특히 두 영화 모두 ‘이중 구조’의 공간을 통해 현실을 거울처럼 비춥니다. '겟아웃'의 정원 파티 장면은 백인 사회의 가식적인 교양을, '어스'의 해변 장면은 정상 가족의 환상을 반영합니다.
조던 필은 이처럼 일상의 공간을 뒤틀어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냅니다.
[주체는 누구인가(공포의 주체)]
조던 필의 영화는 공포의 주체를 관객에게 넘깁니다. 그는 특정한 괴물이나 외부의 악인을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괴물이 나일 수 있다”는 불편한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공포를 확장시킵니다.
'겟아웃'에서 우리는 흑인 남성 크리스를 따라가며 백인 사회의 이면을 목격합니다. 그가 겪는 공포는 인종차별 그 자체가 아니라, 차별이 부재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백인 가족들은 그를 환대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를 상품화하고 소비하고자 합니다. 이때 공포는 제3자의 시선이 아닌, ‘피해자의 시선’에서 발생합니다.
하지만 '어스'에서는 시선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반전은 그조차도 불완전한 ‘진짜’가 아님을 드러냅니다.
복제 인간과의 입장 역전은 관객에게 묻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응원한 인물은 정말 피해자인가?” 이 질문은 ‘정체성’이라는 개념의 불안정함을 강조하며, 단지 선과 악, 주체와 객체로 나눌 수 없는 복잡한 구조를 제시합니다.
결국 조던 필이 말하는 공포는 귀신이나 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사회 시스템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외면하거나 타자화한 ‘또 다른 나’입니다. 그의 공포는 그래서 더욱 깊습니다.
그것은 눈앞에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시선을 의심하게 만드는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조던 필, 공포로 미국을 직시하다]
조던 필의 영화는 장르의 틀을 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겟아웃'은 인종 문제를, '어스'는 계급과 정체성의 문제를 공포로 풀어냅니다. 그러나 그의 핵심 메시지는 일관됩니다. 공포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고 내면화된다는 것입니다.
'겟아웃'에서의 "너무 똑똑한 흑인"이라는 대사는 리버럴 한 차별의 위선을 고발하고, '어스'에서의 "우리는 미국이야"라는 마지막 대사는 배제된 계층조차 미국의 일부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조던 필은 공포의 얼굴을 타자에게 씌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의 괴물, 우리가 무시한 이웃, 우리 사회가 만든 이면을 조명합니다.
그의 영화는 단지 무섭지 않습니다. 오히려 낯선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게 만들고, 관객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조던 필은 공포를 통해 거울을 들이댑니다. 그리고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