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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소시스트', '곡성'의 문화적 해석 비교 (종교, 지역, 악령)

by 장동구 2025. 6. 17.

영화 '엑소시스트'와 영화 '곡성' 포스터

 

이번 글에서는 영화 '엑소시스트'와 영화 '곡성'에 대한 비교를 말할 예정입니다.

해당 작품들은 단순한 공포영화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시대와 문화, 종교와 인간 심리의 맥락이 깊게 깔려 있습니다.

 

특히 고전 서양 공포영화인 '엑소시스트'와 현대 한국 공포영화 '곡성'은 각각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악"과 "구원"을 어떻게 그려내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는 종교적 해석, 지역성과 상징성, 그리고 악령의 의미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두 작품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탐구합니다.

[종교는 구원인가 공포인가 (종교)]

'엑소시스트'는 기독교, 그중에서도 가톨릭의 전통과 의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소녀 리건이 악령에 사로잡히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두 명의 신부가 목숨을 걸고 퇴마에 나섭니다.

 

영화는 인간의 의지보다는 신의 뜻과 종교적 신념에 따라 공포가 제어된다는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악령에 맞서 싸우는 사제는 곧 성스러운 전사로 묘사됩니다.

이 영화에서 악은 인간의 틈을 타 침입하는 ‘외부적 존재’이며, 구원은 종교의 제도와 의식 속에 있습니다.

 

‘엑소시스트’에서 종교는 단순한 의식 이상의 힘을 상징합니다. 사제들의 퇴마는 단지 주술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신의 도구가 되어 악과 맞서는 ‘성스러운 사명’으로 해석됩니다.

 

이 영화는 악령이 깃든 소녀 리건을 구하기 위해 신부들이 자신의 신념, 목숨, 심지어 구원받을 영혼까지 내던지는 희생을 보여줍니다.

특히 카라스 신부는 신앙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던 인물이지만, 악령과의 마지막 대면에서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인간의 통로가 됩니다.

 

종교는 이처럼 공포를 이겨내는 '믿음의 무기'로 기능하며, 초자연적 현상을 인간의 윤리와 신앙으로 제어하는 상징적 해답으로 자리합니다.

 

즉, '엑소시스트'에서 종교는 해결책이지만, '곡성'에서는 오히려 문제를 증폭시키는 매개로 묘사됩니다. 두 작품 모두 종교를 다루지만, 그 방식과 위치는 문화적 차이를 반영하며 완전히 다른 공포 감각을 창출합니다.

 

결과적으로 종교는 '엑소시스트'에서는 구조적 권위로 작동하지만, '곡성'에서는 혼재된 신념 체계가 공포의 원인이 되며, 구원과 혼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 서게 됩니다.

[공간이 만든 공포의 정체성 (지역)]

'엑소시스트'는 미국 워싱턴의 중심부라는 도시적 배경에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일상의 익숙한 공간, 가정이라는 사적 장소에서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도시라는 배경은 악령의 존재를 더욱 충격적으로 만들며, "이성의 세계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불안을 심화시킵니다.

 

대한민국에서 종교는 유교, 불교, 기독교, 무속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으며, 종종 실용적이고 혼합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배경은 곡성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 다른 종교적 접근을 혼란스럽게 혼용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반면 서구 사회, 특히 ‘엑소시스트’의 배경인 미국 가톨릭 문화에서는 신앙의 절대성과 체계화된 믿음의 구조가 공포를 해소하거나 대립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곡성'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무속인을 믿다가 배신감을 느끼거나, 기독교 부제를 불신하며 갈등하는 과정이 곧 종교적 혼란이 곧 공포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이는 서구의 명확한 선악 이분법과 달리, 한국적 상황에서는 종교의 불확실성이 공포의 근원으로 작용함을 시사합니다.

 

반면 '곡성'은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 ‘곡성’이라는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자연과 가까운 공간, 비와 안개, 산과 마을의 좁은 골목길은 미지의 기운과 공포의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이곳의 주민들은 미신과 소문에 쉽게 휘둘리며, 지역성은 곧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장치가 됩니다.

 

특히 ‘곡성’이라는 지역은 영화 전반에 걸쳐 특정한 민속성과 집단적 신앙, 그리고 타자에 대한 공포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도시적 이성에 기반한 '엑소시스트'의 공간 해석과 대조적으로, 무의식과 공동체 정서가 만든 공포의 기원을 보여줍니다.

 

두 영화는 각각 도시와 시골이라는 공간 속에서 공포의 배경을 설계하고, 관객이 가진 지역적 고정관념을 파고들어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따라서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각 영화의 정체성과 공포를 구축하는 핵심 축이며, 도시의 이성과 시골의 본능이 대비되며 긴장감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악령은 외부의 괴물인가, 내 안의 그림자인가 (악령)]

'엑소시스트'에서 악령은 명확히 ‘외부’에서 온 존재입니다.

 

파주주라는 악마는 고대 악령으로, 인간의 틈을 타 침투합니다. 이 악은 분명하고 구체적인 존재이며, 퇴마를 통해 물리적/정신적 싸움으로 제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피해자이며, 싸워야 할 대상은 외부의 절대적 악입니다.

 

‘엑소시스트’에서는 파주주가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이는 인간이 고대 악을 깨우는 설정으로 공포의 전제를 만듭니다. 이후 리건의 몸을 점점 지배하는 악령은 언어 능력, 육체 변화, 반종교적 행동으로 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냅니다.

 

반면 ‘곡성’에서는 악령이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무당, 부제, 외지인, 심지어 경찰의 딸까지도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곡성은 한 장면에서 외지인이 죽은 시체 근처를 웃으며 촬영하는 모습으로 관객에게 강한 불쾌감을 주며, 악령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포, 타자화의 욕망을 투영한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악령은 '엑소시스트'에서 외부의 침입자로, '곡성'에서는 내부에서 불안을 증식시키는 거울로 묘사되며, 각각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상반된 정체성을 지닙니다.

 

곡성의 진짜 공포는 ‘악령’ 그 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불확실성과 무지에 있습니다. 이는 '엑소시스트'가 보여준 ‘확정된 악’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며, ‘악’이란 개념을 보다 철학적이고 심리적으로 해석하게 만듭니다.

 

결국 두 영화는 악령을 매개로 각각 ‘타자화된 악’과 ‘내면화된 공포’를 구축합니다. 《엑소시스트》는 존재론적 악을, 《곡성》은 해석 불가능한 불안을 다룹니다.

 

이는 악의 개념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우리가 그 악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공포의 본질이 바뀐다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결론: 공포는 문화가 만든 거울이다.]

'엑소시스트'와 '곡성'은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라, 각각 서구와 동양의 문화, 종교, 인간관을 바탕으로 "공포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른 답을 제시합니다.

 

'엑소시스트'가 신의 질서를 회복하는 이야기라면, '곡성'은 신의 부재 속 인간이 혼란 속에서 길을 잃는 이야기입니다.

 

'엑소시스트'는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선과 악, 구원과 타락을 명확히 설정하며 공포를 외부화합니다.

 

반면 '곡성'은 종교와 지역, 인간 심리를 엮어낸 복합적 구조 속에서 공포의 경계마저 불투명하게 만듭니다. 두 작품은 악령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다루지만, 그 공포의 성격은 정반대입니다.

 

이는 문화적 차이이자, 공포에 대한 철학의 차이입니다. 공포는 단지 귀신이나 악마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생겨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이 두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증명합니다.